영웅전설 제로의 궤적 에볼루션
플레이 시기 - 2014년 1~2월
플레이 타임 - 57시간
이미 옛날 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대략 6년전까지만 하더라도 팔콤은 PC 게임 회사였습니다. 19금 텍스트 어드벤쳐 게임 말곤 나오는게 없는 정신나간 옆동네 시장에서 코에이 삼국지와 함께 게임 다운 게임을 만드는 유이한 회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죠. 그런데 2006년 구루민을 시작으로 기존 발매된 게임들의 PSP판을 발매하게 됩니다. 이 중엔 회사를 먹여살리는 핵심 아이템인 영웅전설 하늘의 궤적 시리즈도 있었죠. 08년엔 쯔바이2 PC 발매와 함께 쯔바이!!도 이식됐고요. 사실상 이땐 용돈벌이 + 시장확인용 정도라고밖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쯔바이2, 쯔바이2+를 끝으로 팔콤은 완전히 콘솔 회사로 노선을 변경하게 됩니다. 물론 이후로도 이스 크로니클즈나 제로의 궤적처럼 PC판 몇개가 발매되긴 했습니다만 발이식이니, 중국에서 이식한걸 역수입이니 해서 이전까지의 성의라곤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물건들이라 사실상 이 시점에서 팔콤의 PC 게임 계보는 끝장났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쯔바이2의 실적 부진과 PC총판이 작살난게 가장 큰 원인이라지만, 사실 PSP로 하늘의 궤적이 발매된 시점에서 어느정도는 예견된 일이었죠.
어쨌든 그렇게 09년에 브랜디쉬1의 리메이크판 브랜디쉬 더 다크 레버넌트, 이스 1,2의 두번째 완전판겸 이식작인 이스 I&II 크로니클즈와 함께 새롭게 도입한 (저퀄리티의) 그래픽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스 SEVEN이 PSP로 발매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스 7의 경우 PSP판은 선행발매고 PC판 이식이 있을거라 저를 포함해서 많은 팬들이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식 없이 팬 서비스격 게임인 이스 VS 하늘의 궤적 얼터너티브 사가에 이어 2010년 마침내 영전 궤적 시리즈의 신작인 '영웅전설 제로의 궤적'이 PSP로 발매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PS 비타가 발표되고 거기에 맞춰 팔콤은 세 개의 게임을 발표하고 2012년에 발매하게 되는데, 하나는 비타판 이스 셀세타의 수해, PSP판 나유타의 궤적,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캐러애니에서 작업한 제로의 궤적의 풀보이스 비타이식판인 '영웅전설 제로의 궤적 에볼루션'이었습니다. 물론 셋 다 구입하고 제로에볼을 마지막으로 셋 다 클리어했고요.
이번 파판도 그랬습니다만 좋아했던 타이틀의 리마스터작이나 이식작 소식을 보면 서로 상반된 두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난 순수한 기대고, 하난 이미 했던 게임에 시간을 또 들여야한다는 부담스러움. 특히 그게 RPG일 경우엔 더욱 그렇죠. 제로의 궤적도 이미 PSP판 발매됐을때 구입해서 플레이 타임만 5~60 들여 클리어했던지라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구입해서 처음 시작했을 땐 한숨만 나왔지만 워낙 원판 자체를 좋아했고 생각보다 이벤트 풀 보이스의 메리트가 엄청나서 무지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었죠.
우선 제로의 궤적이란 게임 자체만 놓고 평가하자면 하늘의 궤적 시리즈에 이은 최초의 완전 신작 궤적이란 점이 중요하겠네요. 일단 게임 플레이는 간만에 나온 후속작 치곤 큰 변화 없이 조금 밋밋한 편입니다. 우선 하늘의 궤적 the 3rd의 체인 크래프트와 서포트 효과를 발전시켜 캐릭터 합동 필살기인 콤비 크래프트와 서포트 크래프트가 추가되었습니다. 전투 돌입은 단순히 유리, 일반, 불리 인카운터에서 더 발전해 필드에서 적을 공격해서 기절시키거나 레벨차가 큰 적은 아예 해치워버릴 수 있는 액션이 추가되었고, 이와 연계되어 일제공격 시스템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투면의 변경점은 이게 다입니다.
스토리 진행의 경우 지금까지의 영웅전설 시리즈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영웅전설은 기본적으로 이셀하사편이든, 가가브편이든, 하늘의 궤적이든 기본적인 전개는 주인공 파티가 어딘가를 여행하면서 곳곳의 사건을 해결하고 다닌다는 식의 전개였죠. 하지만 제로의 궤적에서 주인공 파티는 크로스벨시의 경찰로서 시내의 특무지원과 건물에서 숙식하며 크로스벨시내와 그 주변에 딸린 작은 마을과 병원, 경비문 등의 시설을 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닙니다. 즉, 플레이하는 내내 움직이게 되는건 이전 시리즈의 마을 두세개를 합친 정도 수준으로 조금 큰 크로스벨시와 부속 마을 및 시설 대여섯개, 그리고 그에 딸린 던전 뿐입니다.
처음 발매되었을땐 이에 관련한 비판도 있었던것 같은데, 글쎄요, 저는 스토리 전개에 맞는 적절한 진행이었다고 일단은 생각합니다.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같은 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게 되는 만큼 팔콤 RPG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NPC들의 스토리도 더욱 잘 다룰 수 있었고요. 어떻게 보면 이스나 쯔바이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기도 하군요.
의뢰와 관련된 시스템도 길드가 아니라 경찰 특무지원과에서 지원요청을 해결한다는 형태로 형식만 바뀌었을 뿐 수사관 랭크 시스템을 포함해서 전작과 같고, 쿼츠도, 요리도, 낚시도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같습니다. 최강 무기를 위한 책 모으기도 여전히 존재하고 전투 수첩을 비롯한 데이터 채우기도 조금 더 체계화됐을 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 추가요소라면 PSP 원판 시점에서 트로피를 대신해 들어간 실적 시스템이 있는데, 실적 포인트를 이용해서 회차 플레이 인계요소와 클리어 특전을 얻을 수 있다는 점 정도가 새로운 요소로군요.
일단 세계관은 같아서 전작들의 캐릭터가 출연은 활동 무대가 바뀐 완전 신작이라 주역들은 모두 새로운 캐릭터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작품과 벽의 궤적을 궤적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 캐릭터들을 정말 잘 뽑았다는 점입니다. 로이드 에리 티오 랜디 특무지원과 4인은 물론이고, 제로궤적 시점에선 조연인 차이트와 키아나 리샤, 노엘, 와지, 더들리, NPC인 세르게이, 이리아, 세릴, 심지어 일러스트가 없는 엑스트라 캐릭터들까지 정말 버릴 캐릭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하나하나가 매력적입니다.
일단 중심이 되는 네명은 각각의 배경이나 전문 분야, 캐릭터적인 면이 모두 적재적소에 넷이서 하나라는 느낌으로 조합이 정말 잘 되어있으며 이 넷에 키아, 차이트까지 적절히 녹아들고, 스토리 전개면에서도 한집 생활을 하는 같은 동료인만큼 말그대로 가족같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특히 중후반부에 이르러 캐릭터들의 유대감을 보여주는 이벤트들은 전작들에서 어빈-마일 사이의 관계를 제외하면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훈훈해요.
덤으로 본작의 다른 주역 셋에는 호감도 시스템이 있어서 스토리 진행과 가구 구입, 의뢰 선택지 등을 통해 호감도를 올리고 특수 이벤트를 볼 수가 있으며 콤비 크래프트를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본작의 시점에서는 조금 심심한 느낌이 있습니다만, 이 시스템이 후속작으로 이어져서 벽의 궤적은 연애의 궤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호감도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론 이번작을 포함한 크로스벨 궤적의 스토리를 지금까지의 궤적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좋아합니다. 주인공 특무지원과 일동은 에레보니아 제국과 캘버드 공화국이라는 제무리아 세계관의 양대 강국 사이에 껴 마치 속국이나 다름없는 크로스벨 자치주의 경찰, 그 중에서도 유격사의 짝퉁 취급을 받을 정도로 대우가 안좋은 부서입니다. 이렇게 유격사들과는 달리 훨씬 더 책임감있으면서도 무력한 입장에서 의원들의 부정부패, 마피아들의 이권다툼을 포함한 현실의 부조리와 한계의 벽을 넘고자 하는 노력이 다뤄집니다. 또한 그런 부서인 만큼 구성원들은 각자 저마다의 사연과 이 부서로 들어오게 된 계기를 가지고 있으며,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나아가기 위한 이야기 역시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집니다.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는 일단 후속작인 벽의 궤적에 대한 준비단계가 되는지라 뭔가 전작에서 던져둔 소재들을 크게 회수하는 느낌은 없어서 힘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만, 무책임하게 새로 일만 벌이는건 아니고 이번 작의 중심 사건은 분명히 존재하고 또 마무리됩니다. 덤으로 이번작은 물론 전작에서 쭉 끌어오던 서브 스토리에 가까운 이야기도 하나 마무리가 됩니다. 그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팔콤답게 만족스러운 전개로요.
원판 기준으로 팔콤 게임답게 BGM은 훌륭합니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하늘의 궤적 시리즈, 그리고 최신작인 섬의 궤적과 같이 놓고 비교했을 때 가장 훌륭한게 본작 제로의 궤적과 벽의 궤적 - 크로스벨 궤적의 BGM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다른 두 시리즈도 충분히 괜찮았지만 마음에 드는 곡의 개수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놓고 보면 이번작이 제일 괜찮았습니다. 가장 좋아하는건 후반부 보스전곡인 Inevitable Struggle과 이벤트 곡 '언젠간 꼭'. 둘 다 해당 이벤트에 그보다 더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와 훌륭하게 어울리는 곡들입니다.
이제 업그레이드 이식판인 제로의 궤적 에볼루션으로 넘어와보면, 일단 제목에 에볼루션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 처음 광고때부터 풀보이스만을 내세운만큼 추가요소는 많지 않습니다. 추가 퀘스트가 있긴 하지만 원판에 있던 퀘스트들에 비해 뭔가 깊이가 없다 싶은것들 뿐이고, BGM 전곡을 어레인지하긴 했지만 이것도 새로 추가된 엔딩곡인 '셀룰리안 블루빛 사랑' 정도가 건질만한 곡이고 저 Inevitable Struggle을 포함해서 뭔가 원판보다 힘빠지는게 많아서 호불호가 갈립니다. 덤으로 그래픽쪽의 강화는 전혀 없기 때문에 에리조차 눈뜨고 못볼 정도로 한심한 '흔한 비타 게임의 절경' 같은 장면도 종종 보이고, 원판에서 사람 힘빠지게 만들었던 아르칸셸의 무대공연도 여전합니다. 풀보이스와 함께 그나마 나아진 점이라면 해상도가 올라간 덕에 PSP시절 대사량은 무시무시한데 글씨가 워낙 작아서 한 작품 클리어할때마다 시력이 0.5씩 떨어지는 것 같았던 느낌을 더이상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
그리고 여기에 더해 발매당시엔 이 모든것을 덮어버릴 정도로 정신나간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잦은 프리징이었습니다. 비타 이식을 카도가와에서 담당했던만큼 팔콤측의 검수가 제대로 안된게 원인이었던것 같은데, 안그래도 이벤트 하나 하나의 길이가 무시무시한 게임인만큼 프리징은 치명적인 문제였죠. 실제로 발매 당시엔 이 프리징 때문에 가격이 덤핑 수준으로 떨어지고 온갖 악평을 받으면서 이미지를 깎아먹기도 했습니다. 한달정도만에 팔콤의 협력으로 패치가 배포되고 해결이 되면서 다시 가격이 안정되었지만, 이것도 그렇고 섬궤도 그렇고 은근히 자꾸 성의없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마음에 안든단 말이죠.
그래도 이벤트 대사량이 엄청난 게임인만큼 원판과 비교해서 풀보이스의 메리트는 굉장합니다. 물론 제가 제로의 궤적 자체를 무지 좋아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스토리가 주가 되는 게임에서 이미 그 스토리를 한참 전에 후속작까지 클리어해 모두 꿰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음성 지원 하나덕분에 오히려 처음 플레이할때보다도 훨씬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스토리를 모두 알고 있었기에 이 장면에 음성이 들어가면 어떨까 하고 기대하게 되는게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등장인물들이 워낙 많다보니 NPC의 경우 돌려쓰기도 꽤 되고 코테라 카나코를 포함한 JDK 밴드까지 성우로 써먹는 짓까지 하긴 했는데, 최소한 주요 캐릭터들의 성우 연기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에 정말 좋았습니다.
애초에 전 팔콤 게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불가능하기에, 철저히 팔콤팬 입장에서 평가했을 때 제로의 궤적 정도면 조금 심심하긴 해도 모든 면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후속작입니다. 비타판 이식작인 에볼루션 역시 발매 초기 프리징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현 시점에선 풀보이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미 PSP판을 플레이한 팬도 꼭 한번 플레이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물건이고요. 얼마 전 벽의 궤적 에볼루션역시 발매됐는데 여기선 조금 아쉬웠던 추가요소도 충분히 보강되서 에볼루션이란 이름에 걸맞는 물건이 되었죠.
아무튼, 간단히 말해 현 시점에서 영웅전설 제로의 궤적이란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선택지는 이 제로의 궤적 에볼루션입니다. 팔콤의 상술이라면 언젠간 하늘의 궤적으로도 비슷한 방법으로 용돈벌이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팔콤팬으로서 이런 식이라면 눈감고 구입해서 플레이해줄 수 있을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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